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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널리.알림

2015/01/29(14:32) from Anonymous Host
작성자 : 한재준	조회수 : 4846 , 줄수 : 194

한글의 가치와 또 다른 가능성

우리말을 표기하는 글자 한글엔 여러 가치와 가능성이 담겼습니다.
변환 무궁한 확장성 하나만 잘 살려 써도 생활 문화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고,
다른 여러 특성까지 지혜롭게 살리면, 세계 글자 발달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한글의 가치와 가능성을
더 적극적으로 살려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글에 대한 통합적인 관점과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더 다양한 시각과 입장에서 한글을 살펴보고 연구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어문학적 관점이나 조형 재료 정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한글은 소리, 꼴, 뜻을 통합하는 새로운 체계의 의사소통 방식이며,
또 하나의 예술 형식이기도 합니다.

1. 위대한 디자이너, 세종 이도

1400년대에 한 나라의 왕이 백성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고,
이 글자는 갈수록 그 활용 영역과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제자 체계와 원리의 확장성이 매우 높고, 지속해서 진화할 여지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한 나라의 언어표기 기능 뿐만아니라, 세계 어느 곳 누구에게나 활용될 수 있는
국제적인 의사소통체계로서의 가능성까지 가졌습니다.
도대체 그 시대에 이렇게 체계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글자를 만들어낸 능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세종 이도가 왕세자가 되기 이전부터 책을 가까이했고,
높은 학식과 교양을 두루 갖추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성리학을 중시했던 교육여건도
한몫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특별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무래도 세종의 어진 성품과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 그리고 실천력에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이 백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게 했고,
더 쉽고 쓸모 있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응용하게 한 것입니다.

세종 이도와 그가 만든 한글을 보면 창작 동기와 태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인류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세종 이도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이치를 남다르게 꿰뚫어 보았고,
‘차이’와 ‘소통’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으며,
사용자를 존중하는 ‘배려’와 ‘실용정신’을 디자인에 충실히 반영했습니다.
디자인 동기와 발상이 독특하고, 통합적인 디자인 태도와 방법이 훌륭합니다.

2. 해설서가 있는 계획된 글자

디자인 해설서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디자인 철학과 원리,
방법 등을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착상이 독특하고 과정이 치밀하여 560여 년 전의 내용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디자인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디자이너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명쾌히 말하고 있고, 한글이 크고 멋지게 디자인되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특별한 가치와 그것을 창작과 디자인에 응용할 수 있는 실마리로
소개할 수 있는 근거가 이 책에 있으며, 한글이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33장 66면으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은, 세종의 창제 의도와 목적,
각 자모에 대한 설명, 디자인 방향과 원리, 자모의 조합방식과 체계,
활용방법 등으로 구성되었고, 마지막 부분에는 해례본 저술에 참여했던
대표자 정인지의 글과 학자들의 이름과 편찬시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어느 집안의 가보로 묻혀 있다가, 1940년에 발견되면서 그 내용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글의 진정한 가치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현재의 문제에 대한 개선과 보완 방향의 실마리도 찾게 되었습니다.

3. 새로운 계통의 독창적인 글자

오늘날 세계 글자의 뿌리는 크게 세 갈래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수메르 설형문자, 이집트 상형문자, 중국의 갑골문자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한글은 이 갈래들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특성을 가졌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글자들은 구체적인 그림으로부터 출발해서 단순화ㆍ상징화ㆍ
추상화ㆍ양식화ㆍ개념화되어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림문자繪畵文字ㆍ상형문자象形文字ㆍ표의문자表意文字ㆍ
표음문자表音文字 등의 단계를 거쳐 온 것입니다.
이에 비해 한글은 처음부터 소리글자表音文字의 성격으로 만들어졌으며,
소리를 초ㆍ중ㆍ종성 세 단위로 잘게 쪼개어 표현할 수 있는
낱소리글자音素文字 입니다.
더욱이 그 체계가 소리만이 아니라 뜻까지 아우르는, 곧 표음글자에
속하지만 표의성도 품고 있는 인류사에 없던 독특한 체계를 보여 줍니다.

4. 우주원리를 반영한 보편적인 글자

한글은 민족이나 언어, 국가와 인종의 차별 없이 누구나가 손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녔습니다.
천지자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글자를 만들기 위하여
소리가 나고 들리는 이치를 찾아 사람의 조음 기관을 분석했고,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응용하여 소리에 담긴 정보와 의미를 상징화ㆍ
시각화ㆍ체계화한 결과입니다.
하늘ㆍ 땅ㆍ사람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했고, 발성기관의 조음 구조와 형태를
음성학적으로 해석하여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핵심철학으로 삼은 근원적인 발상과 원리는
그 가치와 활용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원리를 적용한 엄밀한 법칙과 유연한 적용성은 어떠한 소리나
음성의 표기도 가능하게 하므로, 글자가 없는 소수 민족의 표기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국제음성기호로 발전할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5. 최소주의가 적용된 경제적인 글자

한글은 단순한 요소의 생성과 조합으로 끝없이 전개가 가능한
기하학적 체계를 가졌습니다.
≪훈민정음≫ 해례의 제자해에 의하면, 홀소리글자는 하늘ㆍ땅ㆍ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ㆍ ㅡ ㅣ 3개를 기본자로 삼았고, 닿소리글자는
가장 순한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ㄴ, ㅁ, ㅇ 3개를 시초로 한 후,
ㄱ 과 ㅅ을 추가하여 ㄱ, ㄴ, ㅁ, ㅅ, ㅇ 5개를 기본자로 정하였습니다.
나머지 자모는 이 8개의 기본 자모에 가획과 대칭이라는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조형원리를 적용하여 모두 28개의 자모 단위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자모 단위로 ‘변환이 무궁하고 간단하게’ 합자合字 전개하여
천지자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단순한 방식으로 무한에 가까운 형태를 만들어가는 체계는
최소의 변화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기술적 합리성의 경제원칙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한글을 최소주의 미학의 경제적인 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6. 산업화와 정보화에 유리한 과학적인 글자

한글은 소리 체계를 분석하여 그 소리를 일정한 규칙과 질서로 시각화한
글자이므로 그 발상이나 접근 방법 자체가 이미 과학적입니다.
더구나 그 체계가 수학적이므로 자모의 출현순서가 일정하여 모든 글자는
닿소리글자+홀소리글자, 닿소리글자+홀소리글자+닿소리글자(받침)의 순서로
조합 활용됩니다.
이 외에도 닿소리글자와 홀소리글자의 형태 구분이 확연하고,
한 소리에 한 글자가 대응하는 능력도 뛰어납니다.
또한, 같은 계통의 소리를 표기하는 자모의 형태 변화체계도 과학적입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정보를 기억하고 연상하는 것을 도울 뿐만 아니라,
표기법을 명확하게 하고, 산업화나 이진법 디지털체계로 응용되는 통합매체
환경에서는 더욱 원활한 소통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7. 모든 것이 어우러진 통합적인 글자

앞에서 구분하여 밝힌 여러 특성은 실제로는 하나처럼 동시에 작동됩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도 각각 이름과 실체는 다르지만 하나의 질서로 움직이는 것처럼,
소리와 꼴과 뜻도 서로 기능은 다르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치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런 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훈민정음≫에서 밝힌 ‘천지天地의 도道는 오직 음양오행陰陽五行일
뿐이다’ 라는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한글의 진정한 가치를 파악하고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실마리를 찾아내려면
이 대목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볼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알고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8. 오늘의 한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글은 최고 수준의 통합적인 의사소통 체계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글이 그런 수준을 유지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제 때의 한글이 높은 철학과 완벽에 가까운 원리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한글은 복잡하고 산만해진 부분도 많습니다.
현행 글자꼴과 활용체계로는 한글의 핵심 가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그 우수성을 입증하기에도 모순이 따릅니다.
저마다의 편의와 일상의 관습, 시대의 변화와 유행에 따라 적당히 변용해 온 탓입니다.
부분에 대한 연구와 실천은 있었으나 통합적인 접근이 부족했고,
해설서의 내용도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560여 년 전에 세종 이도가 일궈냈던 독창적인 디자인 철학과
원리는 퇴색하고 변질되었습니다.

9. 되살려야 할 한글 정신

위대하게 만들어진 한글이 온전하게 빛을 내려면, 그 위대성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야 합니다.
충분한 이해와 믿음이 더 깊은 사랑과 긍지의 바탕이 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과 긍지가 더 새로운 기운을 솟구치게 하는 법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나 후손들을 위해서도 그들에게 한글이라는 거대한 유산을 통해서,
넘치는 자신감과 희망을 선물해야 합니다.

560여 년 전에 지금의 서울 한복판 경복궁에서 이도라는 이름의 한 중년 남성이
글자 디자인 해설서 훈민정음을 남겼고, 그 속에 세계에 나눌 만한 깊은 철학과
내용이 담겼음을 알려야 합니다.
한 사람의 창작 동기와 태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 실행 과정과 결과가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실감나게 설명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글이 한국어를 표기하는 글자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인류가 체험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의사소통체계라는 사실도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야 하고, 한글의 여러 가치와 특성이 더 널리
활용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광화문의 세종대왕상이나 세종이야기 전시관이 고맙고,
한글마루지사업이나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제안도 너무나 반가운 일입니다.
거기에 더해 국립한글박물관까지 세웠으니 더없이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아쉬움과 염려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글에 담긴 여러 가치를 제대로 살려내려면, 한글을 연구하는 청년
인재 육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어문 중심의 좁은 시각의 연구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장기적이고 통합적인 한글정책이 동시에 펼쳐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종 이야기 전시관이나 한글박물관의 내용도 더 알차게 채울 수 있고,
위대한 한글의 우수성도 끊임없이 살려낼 수 있습니다.

한글동력발전소도 좋고, 한글진흥원도 좋습니다.
한글의 구심점과 동력원이 될 관련 조직이나 기관을 운영하여
한글의 진정한 가치를 통합적으로, 지속적으로, 찾아내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몇 걸음만 더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훈민정음≫과 ≪조선실록≫을 통해서 다시 새기고 있는 한글 정신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너의 남다른 점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라.
그렇게 하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을 해낼 수 있다.
사람과 자연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라. 그러면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생각을 실행할 수 있다.
더 쉽고 더 편리하고 더 쓸모있는 것을 추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