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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9(23:36) from 211.49.99.178
작성자 : 유한짐 (yhanjim@chollian.net)	조회수 : 12597 , 줄수 : 16

‘객관성’의 가면을 벗어라 - 한겨레 책평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역사학자 일곱 명이 역사가로서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돌아본 에세이집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나>(원저 1987년 출간)가 번역돼 나왔다. 19세기 프랑스사 연구자인 모리스 아귈롱, 아날학파의 보수파 피에르 쇼뉘, 프랑스 중세사 연구의 두 거목 조르주 뒤비와 자크 르 고프, 정치사를 연구한 라울 지라르데, 여성사의 개척자 미셸 페로, 국제관계사를 연구한 르네 레몽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에세이에서 ‘일인칭 서술’을 회피해야 한다는 역사학자의 오랜 금기를 깼다.

흔히 역사가들은 자신의 연구 성과의 객관성을 위해 자신의 모습을 항상 숨겨왔다. 그래야 역사학이 ‘과학’으로 성립한다고 믿었던 탓이다. 우리는 기껏 논문의 헌정사나 머리말에서 언뜻 역사학자 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객관성’이란 신화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다. 이미 1968년 프랑스 학생혁명 이후부터 ‘실증주의’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이 책의 공동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르네 레몽은 “역사가가 자신의 시대로부터 영향을 입어 편향된 호기심을 갖게 되며, 자기 세대의 문화에 의존해 과거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선선히 인정한다. 프랑스 68학생운동은 이런 인식을 강화했다. 그래서 청중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먼저 자신이 어떤 ‘사전 이해’를 가지고 연구에 임했는지를 밝힐 것을 요구받는다. 어떤 역사가가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몰입했다는 건 이미 그가 일정한 선입견에서 출발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르네 레몽은 이른바 ‘객관성’의 가면을 쓰는 대신 이처럼 역사가 자신이 어떤 편견에서 출발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게 “주관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의무를 한층 단호하게 확인시켜준다”고 지적한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에세이는 바로 이처럼 역사가들이 어떤 환경과 자극 아래에서 자신의 연구 주제에 매달리게 되었는지를 성찰한다. 글쓴이들은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역사 연구하듯 분석했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이 ‘자기 역사에 대한 에세이’라고 붙은 건 그 때문이다.

엮은이 피에르 노라(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는 이 책의 집필자들이 지닌 공통점으로 “역사가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한 점”을 들었다. 아귈롱은 자신이 신봉하는 공산주의가 19세기의 역사 해석에도 적용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 연구에 착수했으나, 1960년대 이후 그 자신이 공산주의를 포기하면서 대신 ‘사회성’이라는 개념을 포착했다. 8000쪽에 이르는 <세비야와 대서양>을 포함해 100여권의 저서를 쏟아낸 쇼뉘는 16∼17세기의 경제 동향을 기술하는 데서 연구를 출발했으나, 연구영역을 확장해나감에 따라 “사방으로 온통 주변적인 곳들만 보일 뿐 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에 도달”했다. 뒤비는 중세 전반의 경제·사회·미술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신상태’란 개념을 역사연구에 끌어들였다. 르 고프는 중세 특유의 불가사의, 꿈, 상상, 민간신앙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세 서양의 인류학’이라 불리는 성과를 빚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르크 블로흐, 페르낭 브로델 등 이른바 ‘아날학파’ 선구자들의 직계 제자 세대인 이들은 이처럼 역사학 연구의 영역을 상상, 꿈, 불가사의, 민간신앙, 정신, 사회성, 탈중심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일반 독자에게 좀 낯설 수 있지만,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개인사와 성장과정을 통해 자기 역사연구의 ‘사적인 동기’를 솔직히 고백한 것은 드물게 만나는 흥미로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나, 피에르 노라 엮음, 이성엽 등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19500원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