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상 설치라는 것은 결코 우리들에게 낯설지 않다.
넓게 본다면 도시계획부터 좁게 이야기한다면 방안의 기물 배치까지 일상 삶 속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나름의 설치를 하며 산다. 우리가 단순히 어떤 대상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과 사물들 사이 그리고 그들의 문맥들 사이를 주목하고 그들 간의 상호관계와 연관 관계를 고려해야 할 경우 설치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사실 '설치미술'이라는 용어가 미술용어로 정착된 것도 기껏해야 10년을 크게 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으로 설치라는 것의 일상성과 편재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서구에서 미술이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것은 18세기 무렵 미를 추구하는 '보자르 Beaux-arts'로서 예술 체제(Fine
Art)의 일원으로 인정되면서부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차원에서 의 미술의 자율성 획득은 그 이후 더욱 진전되어 작품 자체로부터
모든 미술 외적 요소들을 배제하려는 경향을 드러내게 된다. 설치미술은 바로 이러한 모더니즘 미술의 해체과정과 더불어 본격화됐다. 그리고 여기서 해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술과 삶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미술과 삶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바 있다. 피카소는 1912년 그의 정물화에 의자망 무늬가 프린트된 기름헝겊을 콜라쥬함으로써 회화적 영역이 아닌 외부 세계의 오브제를 회화의 영역에 사용한 바 있으며, 뒤샹의 '변기' 작품은 예술적 제작품만이 아니라 외부 세계의 이미 만들어진 물건의 설치 또한 예술 영역에 포괄되어야 함을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흐름은 1920년경의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 바우'나 1940년대 중반의 루치오 폰타나의 시도들, 즉 캔바스에 구멍을 뚫거나 나이프로 긋는 행위를 통해 회화의 환영적 공간을 극복하고 회화를 건축, 나아가 환경에 융합시키고자 하는 시도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설치가 우선 무엇보다도 예술과 삶의 분리를 극복하고 그 양자를 만 나게 하려는 욕망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설치는 회화나 조각, 건축처럼 어떤 일관성 있는 매체적 기능적 틀을 가진 장르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입체파,
팝아트,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하나의 사조도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장르, 인접 분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개별 장르의 고유성에 도전하는가 하면, 예술의 자율성과 권위, 다른 문화적 맥락과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개념의 해체라는 가운데 형성된 설치는 예술개념 자체 뿐 아니라 그것 을 성립케 하는 제반 구성요소들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 우선 설치에 있어 예술이 발생하는 지점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의 발생은 작품과 관객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즉 의미는 작품 자체에 닫혀 있는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며, 작품은 의미 발생을 위한 촉매제 혹은 자극을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의미는 이제 작품대상이 되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과 사물들 사이 즉 그들의 문맥들 사이 내지는 상호관계와 연관 관계 달리 말하면 문맥 혹은 장에 거주한다. 전시장의 벽과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전시장의 벽과 공간은 그 곳에 걸려진 작품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교섭의 상태에 있게 되며, 따라서 이 벽과 공간의 성격 또한 무색 무취의 중립적인 것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변화한다. 또한 이 결과 작품은 그 중립적인 배경을 가질 필요성이 상실되고 따라서 외부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는 무엇이 된다.(대지예술,
해프닝, 퍼포먼스, 환경예술) 결국 이들 모두는 설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추상적이며 가상적인 자율적 예술공간이 아니 라 경험적인 현실의 실제적인 시간과 공간임을 알려준다. 설치 공간은 일종의 '경험을 경험하는 장소'로서, '보는 것'이 이 모든 과정의 핵심적 계기로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설치 작업은 특히 관심을 가지는 개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몇가지 분류 가능한 양상들로 나타난다. 장소에 대한 관심 장소는 물론 앞서 이야기되었듯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장소의 의미가 첨예하게 살아나는 리얼리티의 장소를 말하며 따라서 문화, 역사적 맥락을 지닌 그러한 장소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작업들은 특수한 장소의 잠재된 의미나 억압된 의미를 활성화시키는 유형들 혹은 특권화된 공간에서의 작품 수집과 학술 연구 그리고 디스플레이에 반영되는 문화적 '진실'을 의문시하는 유형들, 그리고 건축 언어에서 발견되는 사회적 맥락을 공공적, 사적 그리고 공동체적 감각에 연결시키는 유형들 등 여러 양태를 취한다. 예를 든다면 건물을 포장하거나 방대한 지역에 우산 설치작업을 시도했던 크리스토의 작품들, 혹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독일관 전체 바닥을 파헤치고 히틀러 사진을 걸어 놓았던 한스 하케의 작품, 전시장 벽에 작품이 걸릴만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특유의 무늬로 덮어버린 다니엘 뷰랭의 작품 등이 그것이다. 미디어에 대한 관심 오늘날의 정보화 추세는 전자 미디어에 의해 인간의 신체가 척도였던 우리의 환경의 규모, 인간의 생체리듬과 운동 속도에 근거했던 시간 개념, 말과 글로 전달되었던 정보의 의미 등을 전부 재조직하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자연스럽게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킨다. 특히 다양한 전자 매체의 허구적인 차원들에 반대하여 실제의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는 작업들이 부각된다. 여기서는 새로운 대량소통의 테크놀로지들의 또 다른 소통 가능성을 꾸준히 탐구해 온 백남준의 작업이 좋은 사례가 된다. 담론에 대한 관심 쌍방적 대화에 대한 관심은 어쩔 수 없이 형식보다 내용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주제가 추상적이라기 보다는 설명적으로 부각되며 담론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다. 제니 홀쩌의 광고의 전략을 빌어 자신의 체험을 나누고 소통하려는 전략 등 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치미술 : 그 수용, 정착과 관련한 몇가지 논의 - 이 영 옥 (미술평론가. 전주대 미술학과 교수) 『현대미술관연구 제 7
집』 (199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