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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에 있는 한국의 젊은 멋질비

글쓴이
금누리
쓴날
2005-06-16 17:34
본수
67924

1979.02.02 에 나는 '한국의 젊은 멋질비들'이란 멋질 잔치 때문에 빠리에 내렸는데,
그것은 멋의 바다라고 알려진 빠리를 둘러보기에 좋은 말미가 되었다.
그즈음만 하여도 다른 나라로 나들이 가는 것은 나랏일처럼 따져 들어주지 않으면 어려웠다.
다른 느낌으로 더 배우기를 바라던 나는 그 나들이를 헛되이 보낼 수 없다.
멋질 잔치를 마치고 나는 베를린과 빈, 런던, 로마, 아테네, 암스테르담 들들 유롭의 큰 고을들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빠리다. 내가 더 배워야할 배움터는. 빠리다"

빠리, 그 고을 가운데 크게 기릴만한 오늘날 멋질 집과 그에 딸린 큰 책 집이 새로이 열렸는데,
'뽕삐두 가온집'이라고 불리는 이 집은 움직이는 설기덩이처럼 새로운 속뜻을 지니고 세운 집이었다.
내가 다른 나라에서 온 나그네로 이곳 빠리의 배움터 선비가 되기에 앞서 몇 달 머물러 있을 때,
그림덩이와 같은 이 책집에 거의 날마다 들렸다.

온갖 그림들
온갖 책들
온갖 움직그림들
온갖 소리널들
온갖 마당놀이들

그리고 그런 볼거리들보다 더 좋은 것은 책집 안에 있는 그러한 것들을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모든 걸상이나 공부상은 한 자리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쓸 사람이 스스로 옮길 수 있었고 마루 바닥에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번개 줄 꽂이 뚜껑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우리는 듣고 싶은 노래를 골라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춤추며 책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님이 그 집 책꽂이에 있던 책들을 뽑아 보다가 베개 삼아 바닥에 누워 쉬며 잠이 든다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님을 일으키지 않고 그 베개 이름만 쪽지에 살짝 적어둔다.
그런 온갖 느낌을 지닐 수 있는 마음 씀씀이가 나를 빠리에 있는 배움터에서 배우도록 떠민 것이다.


...

그래서 나는 빠리에 있는 그림과 멋질 배움터들 몇 곳을 찾아갔다.
빠리에 있는 거의 모든 배움터들은 그 크기가 작았다.
겉모습처럼 배움터는 좁고 작아서 그곳을 둘러보는 나의 힘을 뺏으나 배움터 안에 갖춰진 것들은 알차면서 부드럽고 멋졌다.
내가 문을 두드린 큰배움터 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arts appliquEs et des mEtiers d'art 도 넓지는 않으나
여러 가지 바람결을 지니고 있었고, 일하는 방에는 100가지가 넘는 망치들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배우고 싶다는 뜻을 곧바로 내었고, 셀 수 없이 멋진 망치질들을 배우게 되었다.


솜씨가 늘게 되면 어려운 일도 쉬워지듯이, 여러 가지를 해보고 바로 겪어 본 나의 삶은 더 마음대로 헤쳐 나갈 수 있게 된다.
한걸음씩 내 망치질은 더 자랐고, 빠리의 삶도 잘 알게 되었다.
누구나 함께 쓰는 커다란 책 집에서 손에 책을 들고 홀로 춤추는 사람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나는 오래도록 힘을 다하여 공부했다.
그리고 배움터에서 쇠를 다루는 일을 두해가 다 되도록 배워 마칠 즈음 어느 날,
나는 쇠 한쪽과 망치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느낌은 마치 내가 씨름 터에서 하늘 아래 으뜸이 된 놈처럼 즐거움과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한 때도 되지 않는 바로 뒤 다른 나라에서 홀로 공부하며 으뜸이 되었다는 자랑스러운 생각은 무너져 내렸다.

다루는 길은 많이 익혔지만, 솜씨는 일을 하는 데 쓰이고 있어야 할 손매이지 그 알맹이는 아니다.

새로이 지어 만들려면 솜씨가 있어야 하나, 솜씨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가 ?

기쁨은 너무 짧았다.
나는 솜씨를 키워 얻으려고 배움터에서 있는 힘을 다 쓰며 익혔다.
그런데, 나는 젊은 때를 왜 이렇게 바보처럼 보냈던가 라고 스스로 물어 본 것이다.
나는 보름이 넘도록 수렁에 빠진 듯 했다.
배우거나 가르침이 없이도 익혀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

그 때 나는 배움터에서 익히고 하던 일을 멈추었으나 두해나 다닌 배움터 안 밥집에서 여는 때처럼 끼니는 때웠다.
그 때 놀라운 일은 여섯 달 내내 같은 밥 차림이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나는 배움터에서 해마다 200가지도 넘는 진지를 받아본 셈이다.

처음에는 맛이나 밥 멋을 알 겨를도 없이 그저 일할 힘을 얻으려고 먹었다.
그러나 그 많은 먹을거리를 나도 모르게 즐긴 셈이다.
끝내, 나는 맛 차림도, 스승들의 몸가짐도, 모임을 만드는 것도, 배울이들이 지닌 생각들도 서로 나누며 배운 셈이다.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빠리에 있는 한 멋질비 내가 했던 생각:

1981 해 프랑스 나라님을 뽑는 일은 누구도 미리 알아차릴 수 없이 서로 엇비슷하였다.
앞서 있는 두 사람은 그 때 나라님 지스카르 데스탱 giscard destin과
바로 맞서고 있는 프랑스와 미테랑 franCois mitterrand 이었다.

첫 겨루기에서 지스카르 데스탱이 이겼다.
그러나 이래 뒤, 마지막 두째 겨루기에서는 프랑스와 미테랑이 이겼다.

나라님 뽑기는 아름그림과 멋질을 생각하면 매우 따져볼만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바로 그 때 나라님이 하던 일은 사람들의 멋과 아름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 때 나라님 지스카르 데스탱은 임프레쇼니스트 처럼 옛 차림을 하고 있었고,
맞선이 프랑스와 미테랑은 알려지지 않은 그림비인 셈이나,
그 때는 레알리즘 위의 레알리즘 처럼 네오 레알리즘이 새로이 태어날 때였다.

지스카르 데스탱 바로 먼저 나라님이었던 조르즈 뽕삐두, 그는 움직그림비 이었다.
조르즈 뽕삐두가 나라님일 때 일궈 마련한 뽕삐두 가온집을 보라, 그 곳 꾸밈새를 둘러보라.

이는 지스카르 데스탱이 프랑스의 아름멋 물결을 임프레쇼니즘 때로 되돌렸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알려지지 않는 그림비는 왼쪽으로 치우친 무리에 딸려 나타나선 사람이다.

나는 그림비 또는 멋질비로서 누구를 멋 그림처럼 골라 뽑아야 하는 가 ?

골라야 하는 이래 사이 줄곧 나는 임프레쇼니스트 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레알리스트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런 멋질비의 생각과 속뜻으로 이래 뒤 어떻게 일을 끼치며 다시 새로이 뽑히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어째든 나라님이 이래 뒤에 다시 새로이 바뀌었다.

그 때에 새로이 넘어서는 레알리즘 물결이 아름 멋 마당에 퍼졌고,
나는 그 이래 안에 젊은 그림비들의 생각이 일을 끼친 것으로 느꼈다.

마침내 나라 다스리는 일을 쉬운 생각으로 따져보아 밀며 도운 것이다.


프랑스 나라님, 프랑스와 미테랑은 14 해나 지나도록 멋질비나 그림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빠리 밖 커다란 문과 아직 짓고 있는 새 나라 책 집처럼 멋질을 이루었다.
이것들은 미니말 다음 것들이다.


조르즈 뽕삐두는 움직그림비이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첫 무렵 임프레쇼니스트이다.
프랑스와 미테랑은 레알리스트 이었고, 그는 미니말 다음 멋질비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새 나라님 자끄 시락 jacques chirac 은 내가 바라는 바를 들어줄 수 있을 가 ?

나는 앞날의 프랑스가 번개 그림 안을 참삶처럼 드나들 줄 아는 마음을 지닌 나라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앞날의 프랑스 나라 일들만이 아니라,
땅굴 속을 달리는 줄수레 안에서 춤추자는 허름한 아낙네 말을 들어주는 열린 마음도 알게 되었다.


나와 함께 배우고, 나를 바라보며 춤추라.

...
...
...

1995
...

7L2l
-T
D


덧말: 10 해 앞에 잉글리시로 먼저 쓴 나의 글을 10 해 뒤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